내가 여자구나, 라고 실감했던 순간들
초등학교 시절부터 라디오 PD가 꿈이었다는 그는 그래서인지 여전히 앵커보다는 PD라는 호칭에 마음이 간다면서 자신의 일을 소개했습니다. 여중-여고-여대를 나와 남자의 일과 여자의 일이 구분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랐다는 김현정 PD는 뒤늦게 자신이 여자라는 현실을 직면해야 했던 순간들을 나눠주었습니다.
첫 번째는 취업관문에 부딪혔을 때였습니다. 많은 인원을 뽑지 않는 자리일수록 여자는 더욱 불리해집니다. 특히 1년에 딱 한 명을 뽑는 자리라면, 여자가 남자보다 정말 월등한 실력을 보이지 않는 한 여자로 그 자리를 채우려는 회사는 별로 없습니다. 똑같은 수준이어서도, 그저 1.5배 정도 나아서도 안 됩니다. 말 그대로 월등한 실력차를 보여줘야 한다는 이야기죠. 단 하나의 라디오 PD 자리에 간신히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던 김현정 PD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신이 잘해야 뒤에 올 여성들에게 기회가 있을 거라는 책임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발탁되었을 때였습니다. 음악방송 PD를 하던 시절, 뜻하지 않게 두어 번 진행자 대신 마이크를 잡았던 것이 기회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시사프로그램에 잘 어울리는 목소리'라는 이유로 추천이 되었을 때, 적지않은 우려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갓 서른인 '어린' 나이, 그것도 여자, 기자가 아닌 PD라는 것이 삼중의 핸디캡이었던 거죠. 그런 우려를 뚫고 그 자리에 들어간 만큼, 다시 한번, 내가 못하면 그냥 '김현정'이 못하는 게 아니라 여자라 못하는 것이 될까봐 마음을 다잡았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모두들 예상하시다시피,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남편이 아무리 가사를 거든다 해도, 늘 '돕는다'는 말 이상을 넘어서기 힘듭니다. 더구나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로 가면, 주된 책임이 여성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지요. 김현정 PD는 하루 14시간 넘게 일해야 하는 날이 허다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일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그 무엇도 아니고 '육아'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조언을 덧붙였습니다. 아이를 낳기 전에 아이를 누가 돌볼지 대책을 꼭 마련하는 것이 좋다고요. 뚜렷한 계획 없이 아이를 낳은 많은 친구들이 결국 자신의 일을 포기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웠다고 합니다.
우선순위를 세우고 집중하기
Q. 남성이 다수인 직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성들과의 네트워크도 중요할 텐데요. 아이 엄마로서 부딪히는 한계가 있을 텐데, 어떻게 해결하시나요?
싱글일 때는 별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회식 자리, 저녁에 일어나는 모임들에 어쩔 수 없이 빠지기 시작하고, 또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아예 배제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많은 중요한 일들이 그런 비공식적 자리에서 논의되고 결정되기도 하지요. 김현정 PD는 어쩔 수 없이 저녁에 벌어지는 모임들은 포기하되,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중요한 행사나 자리는 꼭 간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 대신 1:1의 관계들에 최선을 다해 좋은 선배, 후배가 되는 걸로 보완하는 쪽을 선택했답니다.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어요. 자기 기준을 갖고 우선순위를 세우는 게 중요해요."
Q. 엄마로서 일을 하다보면 죄책감에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아이에게 충분히 시간을 쏟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고,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내 탓이 아닌가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요.
Q. 아이를 기르면서 일을 하는 게 정말 힘듭니다. 돈을 넉넉히 버는 일도 아니고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돈 벌어 도우미 비용으로 쓰면 거의 남지도 않는데요, 계속 일을 하겠다는 게 이기심은 아닐지 갈등하고 있습니다.
육아와 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두 참여자의 질문에 김현정 PD는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두 아이에게 딱 1년씩 모유수유를 했는데, 지하의 눅눅한 여직원 휴게실에서 3시간마다 유축을 해서 아이에게 가져다 먹여야 했다고 합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게 죄책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며, 지금이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을 것 같다고요. 일에서 그렇듯이 아이에게도 모든 것을 다 해줄 수는 없습니다. 육아에서 역시 김현정 PD는 자기 기준에 따라 정말 중요한 것을 정하고, 그것만은 분명히 챙긴다고 생각하는 걸로 마음을 달랜다고 했습니다.
육아에 집중하기 위해 일을 포기하는 게 나을까? 많은 여성이 고민하는 문제이지만, 여기에 정답은 없겠지요. 김현정 PD는 그런 고민을 해야 하는 고통에 깊은 공감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이 아니라 10년 후, 20년 후를 생각하면서 결정을 내리라는 조언을 덧붙였습니다. 아이에게 소홀한 듯해 마음이 무거울 때마다 "나중에는 아이가 일하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할 거야"라고 생각했다는 본인의 경험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첫 길을 낸다는 마음으로
김현정 PD는 "내가 첫 길을 낸다는 마음으로 일을 하면 편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앞서 있던 사람들에게 기대도 원망도 하지 않는 대신, 다음에 올 사람을 위해 길을 낸다는 책임감은 갖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여성에게 녹록치 않은 현실이고, 때로 앞선 여성이 오히려 더 혹독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자신이니까요.
사회가 변하긴 하죠. 그렇지만 그 변화는 정말정말 더디게 와요.
그러니 느린 변화를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자리에 가려는 여성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한 명 한 명의 여성이 버티고 이겨내, 다음에 올 여성들에게 조금씩 더 나은 시스템을 줄 수 있길 바라는 소망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분투는 하루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겠지요. 강연 내내 김현정 PD는 '오래 가려면 유연해야 한다. 튕겨나고 부러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새벽 4시에 하루를 시작해야 하니 부모님 칠순잔치쯤 되지 않으면 저녁 일정을 전혀 잡지 않아요. 그럼에도 이 자리에 와달라는 요청은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모인 분들의 손을 잡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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